<오스트리아의 황후 엘리자베스 씨씨와 로미 슈나이더>
오스트리아의 황후 엘리자베스 씨씨는 현대의 황후들 중에서 최고의 미인으로 꼽히고
파란많은 생애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오스트리아의 여배우인 로미 슈나이더는 엘리자베스의
역할을 하면서 세계적으로 잘 알려지게 되었는데 영화속에서 그녀의 모습은 정말로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로미 슈나이더는 그후 알랭 들롱의 애인이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바랐던 것과
는 달리 그와 결혼하지는 않았다.
로미 슈나이더와 알랭들롱
로미 슈나이더의 인생은 기묘하게도 엘리자베스 황후의 인생과 닮아 있었다. 로미 슈나이더
는 1966년에 독일의 한 감독과 결혼을 했고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몇년 후에 남편과 이혼했다.
그녀의 두번째 남편은 나중에 자살했다고 한다. 이혼한 후에 그녀는 재혼했는데 1981년의
어느 날 어린 아들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에 깊은 슬픔에 사로잡힌 그녀는 두번째
남편과 이혼했으며 그 다음해에 자신의 집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때 45세였던 그녀의 집에서 술과 수면제가 발견되어 자살에 대한 의혹이 있었다. 아들이
죽은 후 그녀는 술과 수면제에 의존하며 지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심장마비에 의한
죽음으로 결론이 났다. 로미 슈나이더는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유럽인과 오스트리아인들에게는 아름다운 황후를 연기한 추억 속의 여배우로 남아있다
고 한다.
<프린세스 시씨> 영화 속의 엘리자베스 시씨 역의 로미 슈나이더
<프린세스 시씨> 영화 속의 엘리자베스 황후와 프란츠 요제프 황제
<오스트리아의 황후 엘리자베스 시씨의 이야기>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재위했던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는 결혼을 4번 했지만두번째 마리아 테레자만이 자식들을 낳았다. 황후 마리아 테레자가 낳은 13명의 자식들
중에서 2남 5녀의 자식들이 살아남았는데 맏아들은 간질과 정신적 문제가 있었으며 두번째
아들도 황제가 되기에 부족한 황자였다.
1805년에 프란츠 황제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와의 전쟁에서 패배했고 그후 유럽대륙은
프랑스의 영향력하에 놓였다. 유럽의 정복자였던 나폴레옹은 1810년에 황후 조세핀과 이혼하고
새 황후를 찾았는데 그러자 많은 유럽의 왕가에서 적과 공주를 결혼시키지 않으려고 서둘러
공주들의 혼담을 추진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결국 정략을 위해 황녀인 19세의 마리 루이즈를
나폴레옹의 황후로 줄 수밖에 없었다. 마리 루이즈는 아름다운 금발미인이었는데 나폴레옹을
사랑하지는 않았으나 그와 결혼했다.
마리 루이즈와 나폴레옹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나폴레옹 2세가 어렸을 때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의 실패로 인해 연합군의 공격에서 패배하면서 몰락하게 되었다. 그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엘바섬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황제의 자리에 복귀했을 때 나폴레옹2세는
세살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워털루전투에서 패배하여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되었고
1821년 나폴레옹2세가 11세였을 때 세상을 떠났다. 나폴레옹2세는 오스트리아에서 외조부인
황제 아래에서 자라났으며 그의 모후인 마리 루이즈는 이탈리아 파르마 공국의 공작이 되어
아들을 버리고 떠나버렸다.
오스트리아에서 나폴레옹2세는 라이히슈타트 공작이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황궁에서 그보다
더 매력적인 청년은 찾기 힘들었다. 그는 잘생겼으며 지적이고 고상했다. 황제 프란츠는
자신의 자식들보다 외손자인 그를 더 사랑했다고 한다.
마리 루이즈 황후
프란츠 황제는 맏아들인 페르디난트를 이탈리아 사보이 왕국의 공주였던
마리아 안나와 결혼시켰다. 그녀는 오스트리아의 황태자와 결혼한 후에
자주 간질발작을 일으키고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남편 곁에서 살았다. 남편이
헛소리를 하고 문제가 있는 행동을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슬퍼했으나 그를 버리지 않았으며 충성스러운 아내가 되어주었다.
두번째 황자인 칼 대공은 바이에른의 조피 공주와 결혼했다. 조피는 바이에른의 공작인 막시밀
리안 1세와 바덴의 카롤리네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딸들 중 하나였다. 그녀의 쌍둥이
여동생인 빌헬미네 공주는 작센의 왕인 프리드리히의 왕비가 되었다. 무척 영리했던 조피는 오
스트리아의 칼대공이 둔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와 결혼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나 그 결혼을 받아
들여야만 했다. 그때는 거의 모든 공주들이 정략결혼을 했기 때문이었다.
마리아 안나 황후
프란츠 황제의 네번째 황후는 조피의 이복언니였던 샤를로테 황후였다. 그러니까 조피는
이복언니의 의붓아들과 결혼하게 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의 궁정에서 조피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남편은 조피에게 냉정하게 대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피는 나폴레옹2세였던 라이히
슈타트 공작과 친구가 되었고 그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대부분의 궁정인들은 그들의 사랑이
플라토닉한 것일 수밖에 없을 거라고 여겼다.
조피는 5남 1녀를 낳았는데 1남은 태어난 후 곧 죽었고 1녀인 안나황녀는 간질을 물려받아
어려서 세상을 떠났다. 1남인 프란츠 요제프는 영리하고 미남이었으며 2남인 페르디난트는
낭만적이고 부드러운 성품이었으며 3남인 칼은 조용한 성품이었고 막내였던 4남은 허약한
편이었다. 4명의 아들들 중에 둘째인 페르디난트는 첫번째 아들인 프란츠 요제프가 태어나고
나서 2년 뒤에 태어났는데 그때 그 황자는 라이히슈타트 공작의 아들일 것이라고 여겨졌다.
페르디난트가 태어났을 때 라이히슈타트 공작은 병석에 누워있었는데 조피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에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라이히슈타트 공작은 그로부터 16일 후에 세상을 떠나
고 말았다.
라이히슈타트 공작이 죽은 후에 조피의 성격은 변했다. 그녀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냉정한
여인이 되었으며 그녀의 자식들을 키우는 데 열성적으로 몰두했다. 조피의 남편의 형인
페르디난트 황제는 정신적인 문제로 인해 더 이상 황제의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동생인 칼 황자도 황제로서의 임무를 다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이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
서 오스트리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메테르니히 수상이 물러났다. 황위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황후인 마리아 안나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조피 황자비와 의논하여 조피의
맏아들인 프란츠 요제프를 황제로 세우기로 하고 페르디난트 황제를 설득하여 양위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프란츠 요제프는 18세의 나이로 오스트리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라이히슈타트 공작(나폴레옹2세)
조피 대공비
조피는 자신의 여동생인 바이에른의 공주 루도비카의 맏딸을 아들의 황후로 삼기를 원했다.
루도비카는 바이에른의 공작인 막시밀리안과 결혼하여 5남 5녀를 낳았는데 5명의 딸들은
다들 뛰어난 미인들이었다. 조피는 다섯 공주들 중에서 첫째인 헬레네가 황후로서의 자격
과 위엄이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바이에른을 방문한 프란츠 요제프는 약혼녀가
될 헬레네가 무척 딱딱하게 자신을 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헬레네는 자유로운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헬레네의 여동생인 둘째공주 엘레자베스는 사랑스럽고 낭만적이었
으며 재미있는 성품인데다 자매들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용모로 프란츠 요제프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엘리자베스 황후
프란츠 요제프 황제
둘째 공주였던 엘리자베스는 어릴 때 시씨라는 애칭으로 불리워졌기 때문에 흔히 엘리자베스
시씨라고 칭해진다. 그녀는 프란츠 요제프를 깊이 사랑하게 되어 그와 결혼하였으나 오스트리아
의 황후가 된 후에 황궁의 엄격한 예법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조피 태후는 군주제가
역경을 겪던 때에 엄격한 태후였으며 조카딸이자 며느리인 엘리자베스에게 공식행사에 황제와
함께 나가고 황후의 임무인 자선행사에 참석하라고 명령헀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그러한
임무들을 하려들지 않았고 자유롭게 지내고 싶어했으며 "남편이 황제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라
고 말하기도 했다. 그녀가 공주로 있었던 바이에른은 작은 나라였고 그러한 임무들이 주어지
지 않았던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아니라 헬레네가 황후가 되었더라면 그러한 임무들을 수행하
는 데 어려움이 없었겠지만 자유로운 성품의 엘리자베스는 시어머니가 된 이모 조피의 잔소리에
힘들어하게 되었고 남편과도 불화하게 되었다. 남편인 황제는 수많은 업무들 때문에 엘리자베스
와 같이 지낼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엘리자베스는 아들인 루돌프, 딸들인 조피와 기젤라 황녀를 낳았으나 조피 태후는 손자와 손녀
들을 위엄이 없는 황후인 엘리자베스에게 맡길 수 없다면서 그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가 직접
양육했다. 화가 난 엘리자베스는 두 딸들을 데리고 여행을 떠났는데 그 과정에서 첫번째 딸인
조피가 죽자 깊은 우울함에 사로잡혔다. 황후는 자주 울고 힘들어했지만 궁정인들은 그런 황후
를 이해해주지 않았다. 황후는 인내심이 많고 강인해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기젤라 공주
세월이 흐름에 따라 엘리자베스와 남편의 사랑은 사라졌고 그들은 그저 친구같은 관계가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궁정생활을 싫어하여 여기저기 여행을 다녔고 남편은 업무에 몰두하는
등 부부는 따로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황제와 황후가 오스트리아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던 헝가리를 방문하게 되었을
때 보헤미언의 기질을 가진 그곳의 열정적인 국민들은 엘리자베스 황후의 뛰어난 미모에
열광적으로 환호했고 그녀의 자유로운 성품에도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의
인기 덕분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우호적으로 지낼 수 있었고 황제와 황후는 헝가리의 왕관을
쓸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남편과 화해했으며 그 결과로 넷째이자
세번째 딸인 마리 발레리가 태어났다. 그러나 그후에도 엘리자베스는 오스트리아로 돌아가려
하지 않고 유럽 곳곳을 두루 여행했다.
마리 발레리 공주
엘리자베스의 아들인 루돌프 황태자는 벨기에의 공주인 스테파니와 정략결혼하게 되었다.
벨기에의 왕이었던 레오폴드 2세는 부유한 왕이긴 했으나 그 부는 콩고를 식민지로 만들어
잔혹한 수탈을 일삼은 결과로 얻은 것이었다. 나중에는 그 일이 유럽에서도 문제가 되어
벨기에 의회에서 왕의 사적 식민지인 콩고를 벨기에 정부의 식민지로 바꾸는 법을 제정했을
정도였다. 루돌프 황태자는 스테파니를 사랑하지는 않았으나 그녀와 결혼했는데 사랑에 의한
결혼이 꼭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테파니는 황후가 참석하지 않는 공식행사에 황후 대신 참석하면서 엘리자베스와
공주들의 심기를 거스르게 되었다. 또 남편과의 사이도 그다지 좋지 않아 둘 사이에는
엘리자베스라는 딸 하나밖에 태어나지 않았다. 황태자 루돌프에게서 후계자가 태어나지 않고
부부 사이가 좋지 못하자 엘리자베스 황후는 화가 났고 스테파니를 못생긴 코끼리라고 불렀다.
스테파니는 갸름한 얼굴에 못생긴 용모는 아니었으나 코가 큰 편이었던 것이다. 스테파니는
황후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황태자와 스테파니는 자주 부부싸움을 했다.
1889년에 루돌프는 애인이었던 몰락한 귀족이었던 남작부인 마리아 베체라를 알게 되었다.
곧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으나 루돌프는 그녀와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그녀와 만나기도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되자 그는 그녀를 총으로 쏘고 자신도 자살하는 동반
자살을 했다. 마리아 베체라는 루돌프를 열렬히 사랑하여 그와 함께 자살했던 것이다. 이 사건
이 일어났을 때 엘리자베스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녀는 그때부터 검은 상복을 입고 평생을
지냈으며 사람들을 기피하게 되었다고 한다.
루돌프 황태자
마리아 베체라
이때 50대였던 엘리자베스는 늙어가는 것도 참기 어려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수영과 승마를 잘했고 황후가 된 뒤에도 군인 수준의 승마를 했으며 20인치의 허리와 50킬로
그램의 몸무게를 유지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살이 찌기 시작하자 그녀는 먹는 것을 줄였고
나중에는 하루에 과일 하나밖에 먹지 않았다. 그리고 주름살이 늘어가자 양산으로 얼굴을 가리
고 다녔다.
61세가 되던 해에 엘리자베스 시씨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호수의 주변을 산책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암살범이 달려들어 그녀를 찔렀다. 루이기라는 그 암살자는 무정부주의자로 오를레앙
공작을 암살하려다가 그를 찾지 못하자 엘리자베스를 살해한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사후에
오스트리아로 옮겨져 황궁의 납골당에 있는 아들의 묘 옆에 관이 놓여졌다. 나중에 남편인
프란츠 요제프가 죽었을 때 그의 유해도 아들과 아내 옆으로 옮겨져 그들 셋의 관은 나란히
있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묘역을 찾아와서 애도를 표하고 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공주
(루돌프 황태자의 딸)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힘든 삶을 살았다. 황후와의 사이는 때로 남남처럼
되었다. 엘리자베스 황후는 여행하러 나가 있는 경우가 많았고 황제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황제가 너무 고독해서 우울증에 빠져있다는 것을 많은 궁정인들이 알았기에 그가 카테리나라
는 정부를 들였을 때 엘리자베스조차 그렇게 하라고 권유하는 쪽이었다고 한다. 카테리나는
신중한 여인으로 나중에 황제에 대한 책을 써달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도 거절했다고 전해
진다.
한편 스테파니 황태자비는 딸을 남겨둔 채 오스트리아를 떠났다. 그후 그녀는 공주인
자신보다 훨씬 지위가 낮은 귀족인 엘레머 로니아이 백작과 재혼했는데 그때에 왕녀가
왕족이 아닌 귀족과 재혼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녀의 부친인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는 스테파니와 의절하였고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도 루돌프 황태자의 부인으
로서 얻은 대공비의 지위와 헝가리 왕자비의 지위를 반납하도록 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그녀를 제외시켰다. 그러나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스테파니를 동정했던 유일한 인물이었고
나중에는 그들의 결혼을 인정하여 스테파니의 재혼한 남편인 엘레머 백작을 후작으로
승격시켜 주었다. 스테파니는 재혼생활을 하면서 "나는 황후가 되어야 했다"라는
회고록을 집필하였다.
스테파니 황태자비
루돌프의 죽음으로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새로운 후계자를 정해야 했다. 프란츠 요제프에게는
세 명의 남동생들이 있었는데 페르디난트,칼,빅터가 그들이었다. 그들 중 페르디난트는 조피
태후가 제일 사랑하는 아들로 알려져 있었다. 조피의 차남인 페르디난트는 벨기에의 레오폴드
1세의 딸인 샤를로테 공주와 결혼했다.
샤를로테공주는 루돌프 황태자의 부인이었던 스테파니의 고모였다. 유럽에서 제일 아름다운
공주들 중 하나라는 찬사의 대상이었던 샤를로테는 그녀가 황후가 아닌 황자비여서 궁정의
엄격한 예법 때문에 엘리자베스 황후보다 더 낮은 지위에 있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도 공주 출신이었는데 오스트리아 황궁의 예법에 따라 황족들은 서열에 따라 홀에 줄을
지어 서야 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 지나가면 낮은 사람은 차례대로 인사를 해야 했기 때문이
었다. 그러던 중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황제(그는 나폴레옹의 조카로 프랑스의 왕 루이 필립
이 혁명으로 퇴위한 후에 황제로 즉위하였으나 나중에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황제에서
퇴위하여 영국으로 망명하였다.)가 멕시코의 황제로 페르디난트를 추천했다. 그때 멕시코는
황위가 비어있어 유럽의 왕족이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페르디난트 대공과 샤를로테
대공비는 그 제의를 받아들이고 멕시코로 향했다.
그들이 멕시코에 도착했을 때 초라한 황궁과 그 나라의 열악한 환경에 둘 다 놀랐으나 곧
그들은 새로 황궁을 짓고 통치준비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멕시코에서는 곧 혁명이
일어났고 페르디난트는 포로가 되었다. 샤를로테는 유럽에서 군대를 파병해야만 남편을
구할 수 있다고 믿고 유럽으로 돌아와 도움을 줄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도움을 얻기
어렵다는 것을 알자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고나서 그치지 않았다. 궁정에서는 정신이상을 일
으킨 그녀를 정신요양소로 보내야 했다. 페르디난트는 멕시코에서 처형되었지만 샤를로테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정신요양소에서 지내면서 자신의 남편은 여전히 멕시코의 황제라고
믿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조피 태후는 제일 사랑했던 아들인 페르디난트가 죽음을 맞자 깊은
슬픔에 빠져 모든 공무에서 물러나 은거하였으며 그로부터 5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페르디난트 대공
샤를로테 대공비
페르디난트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후계자의 자리는 둘째동생인 칼 대공의 아들들에게로
돌아갔다. 칼 황자는 결혼을 세 번 했는데 첫번째 부인인 작센의 요한나 공주는 20세에 죽었
으므로 자식이 없었고 두번째 부인인 양 시칠리아왕국의 공주 이사벨라와의 사이에서 세 아들
들인 페르디난트,오토,칼과 죠세파라는 딸 하나를 얻었다. 그리하여 칼 대공의 세 아들들 중
첫째인 페르디난트가 황제의 조카로서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페르디난트는 프레스부르크 대공비의 시녀인 보헤미아 출신 백작의 딸인 조피를
사랑하게 되어 대공비의 딸을 좋아하는 것처럼 꾸미면서 조피를 만나러 다녔다. 그 일이
발각되자 조피는 대공비의 집에서 쫓겨났고 궁정에서는 페르디난트와 신분이 낮은 조피와
의 교제를 금지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는 조피가 아닌 다른 여인과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결국 페르디난트와 조피의 결혼을 허락했으나 대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에게는 황위계승권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조피는 정식 황태자비가
될 수 없기 때문에 페르디난트를 수행할 수도 없었고 궁중에서의 서열도 낮아서 황족들 중에
서 제일 끝에 서야 했다. 결혼 후에 페르디난트와 조피 사이에서는 딸인 조피와 아들들인 막스
와 에른스트가 태어났다. 그후 페르디난트와 조피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역의 초청을 받고
그곳을 순방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하여 세르비아와 합치기를 바라는
민족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었다. 1914년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의 길을 차로 달리고
있었을 때 암살자인 네드젤코가 수류탄을 던졌는데 황태자의 차가 아닌 다른 차의 밑에
서 폭발해 그 차에 있던 두 귀족들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후 페르디난트는 병원의 부상자들
을 만나기 위해 차를 타고 갔는데 그때 길거리의 코너에 서있던 또다른 암살자가 나타나 황태
자와 그의 부인을 향해 총을 쏴 두 사람을 살해했다. 이 소식이 오스트리아에 전해졌을 때 황궁
은 냉담하게 반응했다. 곧 장례식이 있었으나 황족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는 국가적인 암살이 일어났으므로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에 따라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페르디난트 황태자
조피 황태자비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1918년에 오스트리아와 그 연합국들이 패배할 때까지
유럽은 전쟁의 포화에 휩싸였고 프란츠 요제프는 군주제가 몰락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전쟁 중이던 1916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숱한 비극을 겪었다. 언제나 일만 하는 왕이었던 그에게는 두 딸과 손녀밖에 없었으므로
후계자로 다른 조카인 오토의 아들 칼이 지명되었다.
황태자 페르디난트의 동생이었던 오토는 1900년에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기 때문에
조카의 아들인 칼이 후계자가 된 것이었다. 오토는 작센의 마르가레트 공주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첫째가 칼이고 둘째가 막시밀리안이었다. 페르디난트의 막내동생인
또다른 칼은 그 전인 1909년에 신분이 낮은 여성인 베르타와 결혼했으며 1911년부터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성을 포기하고 베르그라는 성을 쓰고 있었다. 그는 베르타를 사랑하여
결혼했으나 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그러나 칼은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제1차대전은 오스트리아의 패배로 끝났고
그후 공화정에 의해 황정이 폐지되었기 때문이었다. 칼 황제와 지타 황후는 복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나 그후 오스트리아는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칼은 이탈리아 파르마의
공주 지타와 결혼하여 4남 3녀를 낳았으며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는 망명지에서 살다
가 1922년 44세로 세상을 떠났다. 지타 황후는 남편이 죽은 지 67년 후인 1989년에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황조는 몰락했으나 아들들은 대부분 독일의 공국들의 공주들과 결혼했으며
딸들도 결혼하지 않은 첫째 외에 둘째와 셋째는 공작들과 결혼했다. 아직도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에서 가문의 행사에 구성원들이 모이는 등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칼 황제
지타 황후
<엘리자베스 시씨의 자매들>
엘리자베스 시씨에게는 네 명의 자매들이 있어서 그녀까지 포함해 5자매였는데 그녀들은
바이에른의 미인자매들로 알려져 있었다. 첫번째 딸인 헬레네는 프란츠 요제프가 청혼하
지 않자 크게 아쉬워하면서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하고 몇 년간을 자선사업
에 열중하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4년 뒤에 투른-탁시스 공국의 왕자인 막시밀리안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낳고 자매들
중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 그러나 결혼 후 9년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
는 무척 슬퍼했고 저택에 은거한 채 살았다. 아들이 그녀보다 일찍 죽은 것도 그녀의 만년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 자매인 엘리자베스가 찾아왔고 둘은 서로
울면서 작별했다. 그녀는 어릴 때 네네라는 애칭으로 불리웠던 친밀한 맏언니였으며 자매들
중에서 제일 일찍 세상을 떠났다.
헬레네공주
바이에른의 셋째공주인 마리는 이탈리아의 양 시칠리아 왕국의 후계자인 프란체스코와
결혼했다. 그러나 당대의 이탈리아에서는 통일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도 가리발디장군이
각국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양 시칠리아 왕국에 가리발디의 군대가 진격했을 때 프란체스코는
도망쳐 버렸으며 19세밖에 되지 않은 마리가 그러한 상황을 떠맡아야 했다. 결혼을 한 지 2년
만에 마리와 프란체스코는 왕국에서 추방되었으며 로마로 가서 살았야했다.
그곳에서 마리는 사랑하지 않는 남편 프란체스코와 불화했고 벨기에 출신의 어느 백작과
불륜관계가 되었다. 그녀는 임신했는데 스캔들이 두려웠기에 아기가 태어나자 그 백작에서
맡기고는 그와 이별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에 마리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딸인 크리스티나를
낳았으나 그 아이는 3달 만에 죽었다. 마리는 무척 이름답고 매력적이고 용감했으나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다. 언니들과 동생들이 세상을 떠나고 바로 밑의 여동생인 마틸데와 절친하게
지냈으나 그녀의 삶은 외로웠다. 그녀는 왕비가 되지 못했으며 자식도 없었고 재산도 줄어들
어 무척 슬프게 지내다가 1925년에 세상을 떠났다.
마리공주
바이에른의 넷째공주인 마틸데는 언니의 남편인 프란체스코의 이복동생인 로도비코
왕자와 결혼했다. 마틸데는 그 결혼을 원하지 않았으나 1861년에 로도비코와 결혼하여
트라니 백작부인이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에 양 시칠리아 왕조는 몰락했고 프란체스코와
언니 마리는 로마로 갔다. 마틸데 또한 로마로 가서 언니와 함께 지냈다고 한다. 로도비코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고 노이로제로 인해 마틸데를 가혹하게 대했다. 마틸데는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고 로마에서 어떤 장교와 불륜관계에 있기도 했다. 로도비코는 결혼한 지 25년이
지났을 때 호텔방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그후 36년 동안을 마틸다는 제일 사랑했던 언니
인 마리와 친밀하게 지냈던 듯하다. 마리와 마틸데는 둘 다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고 같은
나라에 출가해서 그 나라가 몰락하자 같이 그 나라를 떠났던 자매들이었다. 1925년에 마리가
세상을 떠나자 그로부터 5달이 지나서 마틸데도 세상을 떠났다.
마틸데공주
바이에른의 다섯째 공주인 조피는 외사촌인 바이에른의 국왕인 루트비히 2세와 약혼했다.
그러나 루트비히가 약혼을 취소했기 때문에 둘은 결혼하지 못했다. 루드비히 2세는 바그너를
후원하고 백조의 성을 건축하기도 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국고를 낭비했기 때문에
결국 대신들에 의해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가 타살인지 자살인지 알 수 없는 죽음을 맞은
국왕으로 알려져 있다. 조피는 파혼을 무척 아쉬워했으나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의 일파인
오를레앙 가문의 알랑송 공작인 페르디낭과 결혼했다. 프랑스는 공화정이 된 이후에도 많은
귀족들이 그들의 작위를 그대로 갖고 있었다. 이러한 작위에 대한 법적인 효력은 없었으나
관습적인 인정은 있었던 듯하다.
조피는 남편인 페르디낭과의 사이에서 두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조피는 중년이 되었을 때
그라츠에서 산부인과 의사인 글라저와 불륜관계가 되었고 그와 함께 스위스로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계획은 발각되었고 그녀는 남편인 페르디낭에 의해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되
었다. 조피의 오빠였던 카를이 그녀의 주치의가 되었다고 한다. 조피의 불륜은 누구에게도
동정을 받지 못했다. 정신병원에 있던 조피는 후에 프랑스로 돌아왔는데 그때부터 그녀는
선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1897년에 그녀의 나이가 50세였을 때 파리에서 자선바자회
가 열렸는데 조피가 참석했던 이곳의 행사에서 불이 났다. 그러나 조피는 피신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도왔으며 그 결과 그녀는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망했다고 한다.
조피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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